나의 아늑한 휴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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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둘레길/걷기운동(보호)

◎지리산둘레길 4코스(금계~동강)

큐티 2011. 6. 5. 23:05

 

▲청색 선을 따라 걸었던 금계~ 동강 까지의 코스 (약 4시간 소요)

연휴를 맞아 제이와 함께 토요일 이른 아침~ 지리산둘레길을 걷기 위해 
집에서 아침 6시30분에 출발~ 약 5시간의 운전을 하여 11시30분에 함양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지라 오늘의 교통체증도 만만치 않았다

3년 전 함양여행 중에 시간이 짧아 아쉽게 가지 못하고 포기하고 와야 했던~
오도재를 지나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보기 위해 우선 먼저 찾아 가기로 했다
내비에 저장하여 놓은 안내방향대로 따라 가보니 산으로 높이 올라가는
돌고 돌아가는 오도재의 길은 공기도 상쾌했지만 경치 또한 절경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벽송사 가는 길목에 산장식당이 있어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 서 있는 현위치에서 천왕봉이 바로 직코스로 보인다. 몇년 전 철쭉꽃 만발한 봄날~
   다른방향에서 올라갔던 지리산 세석산장의 그 넓다란 평지에 키작은 철쭉꽃들이 가득했던...
   세석산장이 마치 에덴동산(천국)의 모습처럼 눈에 비쳐져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 달리는 차 안에서 찍은.. 속리산의 말띠고개처럼 구불구불 오르는 오도재의 길목

 

▲ 지리산의 제1문~ 달리는 차 속에서 찍었더니 건물이 쓰러질 듯 하다. ㅋ

 

▲ 함양에 도착하자마자 서암정사 방향으로

 

▲ 서암정사 가는 길목에 있는 점심식사 장소 (오른쪽 창가 쪽으로는 계곡이 보임)

 

▲ 식당 유리창 가에서 바라 보이는 맑은 계곡물

 

 

▲ 산채비빔밥을 기다리면서

 

▲ 드디어 벽송사에 도착

조선 중종 15년(1520년) 3월 벽송 지엄대사가 암자를 짓고 개창한 이곳은 
숙종 30년(170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환성대사가 중건하였으나 
6.25때 다시 법당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1963년 원응 구환스님이 이곳에 와 이 절을 다시 짓기 시작했으며 
1978년 봄에 종각이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송사는 실상사와 더불어 지리산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판소리 ‘변강쇠전’의 무대이기도 하고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쓰였던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 저 위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가 참 멋있다

 

 

 

▲ 이 두그루의 소나무는 천년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道人松과 美人松이라고 한다

 

▲ 뒤 쪽에서 보는 벽송사 전경

 

▲ 오동통통 탐스럽게 자라난 소나무

 

▲ 와 보고 싶었던 서암정사 입구

[서암정사]
벽송사로부터 서쪽으로 600m 지점에 위치한 
벽송사의 부속암자로 주위의 천연 암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작은 부속암자였으나 지금은 사찰로 승격하였다

 

▲ 저기 작은 문을 통과하면서 성경의 '좁은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생각난다~^^*

 

 

 

▲ 맨 꼭대기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사람들이 기도 중 이었다

 

▲ 둘레길을 걷기위해 산을 내려와 차를 주차하려고 공용주차장을 찾으니
    폐교를 주차장으로 넓게 사용하고 있었다 (무료주차임)

 

 

▲ 지리산둘레길 걷기 4코스 시작점인 의탄교-금계마을–의중마을(0.7km)–모전마을 용유담(3.1km)

                                   –세동마을(2.4km)–운서마을(3.3km)–구시락재(0.7km)–동강마을(0.8km)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를 잇는 11km/12.7km의 둘레길이다
금계-동강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이 들어온 6개의 산중마을과 사찰을 지나 엄천강을 만나는 길이다 
사찰로 가는 고즈넉한 숲길과 등구재와 법화산 자락을 조망하며 엄천강을 따라 걷는 옛길과 임도로 구성된다

[참고 : 멧돼지를 만났을 때]
=등을 보이거나 절대 소리를 내지말고 계단이나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뒷걸음질로 걸어 큰  바위나 나무 뒤에 숨는다
=우산을 펼쳐들어 덩치를 크게 보이게 한다

 

▲ 빨간색 화살표 방향으로 걷는다

 

▲ 제주올레길과는 달리 이 곳은 이정표의 인심이 참 박했다 (길찾기 어려웠음)
    제이가 오르는 저기 작은 숲길을 잘 찾아서 걸어야 한다

 

▲ 함양은 지리산 자락이라서인지 공기좋고 물맑아 나무들이 모두 우람하고 싱싱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대나무와 소나무들이 곳곳에 있었다

 

▲ 아기자기한 산 길로 시작되었으며 엄천강줄기 따라 계속 이어진다

 

 

▲ 엄천강에서

 

 

▲ 용유담 위의 용유교

 

 

▲ 빨간화살표 부근에  김종직. 남명 조식. 김일손. 정여창. 강대수선생의 刻字가 쓰여 진
바위가 보인다. 참고로 1489년 김일손의[속두류록].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643년 박장원의 [지리산기].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 1790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서 용유담의 기기묘묘함과 아름다운 절경에 대한 묘사가 쓰여 있다고 한다.

 

▲ 산과 계곡이 이 같이도 좋아서
천천한 걸음으로 나 다시 찾아왔네
은은하게 피어난 꽃 아름다운 빛
망망한 하늘에는 새 그림자 돌아오네
높은 벼랑은 영지 못에 떨어지고
맑은 낮 바람 소리 높이 우누나
놀란 용들아 낮잠에서 깨어라
그대 불러 한바탕 웃어 보리라

뇌계 유호인선생이 용유담에 대해서 읊은 시 이다.

 

▲ 오르막길인 아스팔트길이 너무 길어 달리는 트럭을 세워 견불사까지 이동
   제이는 투덜거렸지만 덕분에 30분정도 시간벌음 (아저씨 진짜 고마워유) 

견불사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둘이 오르면서 우리는 내기를 했다
제이曰- 볼 게 없는 절이어서 見不寺라고...내曰- 부처가 보이는 절이어서 見佛寺라고..
결론은 내가 승리했다. 나중 알고보니 이 곳은
천연와불 성지라서 유명하다고 한다.
이 날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끝내 못 찾고 왔었다는 서글픈 사실을...
그래서 '아는만큼 보인다' 고 하지 않았던가~!

 

▲ 집에 돌아 와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천연와불'은 산의 모양새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ㅎㅎ
    - 위 사진은 타블로그에서 살짝 빌려 온 것임 -
 산봉우리가 영락없는 와불 형상을 하고 있으며 500년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이 곳을 향로봉 미타암이라고 기록을 해 놓고 있으며 와불 형상의 아래 쪽에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10여년간 은둔지로 유명한 선녀굴이 있다는데 못 찾고 지나쳤다

 

<담아온 내용> 

▲투병 중의 정순덕모습과 숨어있었던 선녀굴

 

-정순덕의 생애-

정순덕은 1933년 지리산 삼장면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1950년 1월 열일곱의 나이에 같은 고향마을의 성석조라는 청년과 결혼하고 몇개월 후에 6.25가 터졌다.

 

남편(성석조)는 결혼 6개월만에 빨치산이 되고 그녀도 남편찾아 나섰다가 빨치산이 된다. 남편은 1952년 토벌대에 의해 지리산 대성리계곡에서 사살되었고 휴전이 되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자대원 이홍이와 한조가 되어 지리산에서 10여년간 숨어지냈다. 빗점골. 뱀사골. 내원골. 피앗골. 고운동 계곡. 선녀굴 등등 여러 은신처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1963년 11월12일 고향마을 부근인 내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오른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생포됐다. 마지막 빨치산 여전사가 13년만에 지리산을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그 당시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동료 이홍이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정순덕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85년 8.15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그 이후 일용노동자와 노점상 등으로 전전하다가 서울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노후를 보냈다. 고혈압과 뇌졸중 등 지병을 앓다가 2004년 71세의 나이로 인천 길병원에서 심장마비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순덕의 진술서-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정순덕의 진술서를 읽다보면 한 권의 한맺힌 단편소설같다


 

 

▲ 견불사의 앵두나무 (너무 맛 있었음)

 

▲ 아~ 내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제이한테 좀 따 달라고 했다가 꾸중만 들었다
   산책길 곳곳에는 앵두. 버찌(벚나무열매). 오디(뽕나무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 한여름 더위에는 세진대의 이 자리가 자주 생각나리라
   마적도사가 이 바위 위에서 장기를 두었다는 전설도 있다

 

▲ 산자락의 높은 위치에 있는~ 너무도 탐이 났던 땅 (바라만 봐도 옥토 같다)

 

▲ 더더욱 탐이 났던 이유는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이 경치 때문이다

 

 

▲ 아기자기한 시골의 경치를 지나

 

▲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미리 알아 두었던 곳으로 가는 중..(나의 성격이 엿보이는 뒷모습?)
   제이가 나더러 가끔 '럭비공'이라 부른다. 심사숙고하는 차분한 모습이 안보이기 때문~
   너무 방방 뛰어 다니니까 다음번엔 새끼줄로 묶어서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한다. ㅍㅎㅎ
이번에도 인쇄해 간 여행지도를 잃어 버리고 길을 더 헤매게 되었지만~ 역시 스마트폰
덕분에 인터넷접속해서 내 블로그에 들어가 안내지도를 보면서 예약숙소 전화번호도 찾음 

 

▲ 저녁식사 장소인 지리산 청정낙원

 

 

 

▲ 부근의 경치도 아름답고 식당조경도 잘 되어 있는 사슴고기 식당이다
   아마도 나는 처음 사슴고기를 먹어 본 것 같다.
   제이가 크게 한턱 쏜다(사슴불고기와 사슴육개장으로)..흐음~나이들어 자상해진 내편 

 

▲ 식당에서 바라 보이는 엄천강

 

▲ 저녁식사 후 다시 산길로 들어 선다

 

 

▲ 보이는 경치마다 이렇게 멋있고

 

▲ 저기 앞서가는 제이의 뒤를 따라 향긋한 쑥잎을 뜯어 향기를 맡으며 간다

 

 

▲ 오호~ 안내설명문을 읽어보니 김종직선생도 이 곳에서 쉬어 갔던 곳인가 보다
 동강마을~이 곳을 끝으로 지리산둘레길 4코스의 여행을 접고 예약해 둔 민박집으로 향한다

 

▲ 다음날 이른 아침 풍경이다

민박집 주인부부께서는 오늘 자녀들과 용인민속촌으로 구경을 가셔야 한다며
새벽밥을 지어 주신다..ㅋㅋ.  덕분에 새벽5시 식사를 마치고 아침 6시에 일찍 집을 나서서
시작지점인~ 내 차를 파킹해 두었던 금계마을 주차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를 어쩌나..
시내버스는 오전7시가 첫차란다. 제이와 의논끝에 1시간이나 기다리는 그 시간에 그냥 국도를 따라
천천히 걷기로 한다. 밭일을 하시는 주민에게 금계까지 몇시간쯤 걸리겠느냐 여쭈었더니
1시간 좀 넘을 거란다. 그 쯤이야...생각하며 걷는데 도착지점에 오니 2시간 30분 거리였다
호호호... 하지만 맑은 새벽공기 마시며 좋은경치 보며 걷는 재미도 쏠쏠했다

 

▲ 둘레길 여행자들을 위한 귀여운 화장실 이다

 

▲ 민박집을 나서면 이런 다리가 보이고 ..저 앞에 고기낚는 아저씨가 피래미를 잡고 있었다

 

 

▲ 1시간 30쯤 걸어 오니 이런 아담한 정자가 보여 다리 좀 쉬고

 

▲ 정자 바로 앞 쪽엔 물레방아와 시비도 보인다.  덕곡 조승숙선생의 시 이다

봄을 찾아 술을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가니
뻐꾹새 우는 소리 대낮에 사립문은 닫혀있네
비 온 뒤에 남은 꽃이 물 위에 떠내려가니
사람 사는 어느 곳인들 도원경이 아니겠는가

 

 

▲ 국도의 중간에 있는 사랑목과도 인사 나누고

 

▲ 드디어 주차장에 도착~ 여행 잘 끝냈으니 이제  나의 집으로 고고~!

 

 

▲ 단풍나무의 빨간색 씨앗이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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