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늑한 휴식처

♧덕수궁산책 후 명동 본문

소박한일탈(보호)

♧덕수궁산책 후 명동

큐티 2018. 9. 30. 00:08

9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오늘(9월29일)은 친구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로 했다
먼저 덕수궁을 산책한 다음에 5~60년대의 명동을 그려보면서 걸었다

[덕수궁 산책]
덕수궁은 조선의 메인궁궐은 아니지만 임진왜란때 피난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올때
월산대군저택과 주변민가를 합쳐 만들어 경운궁이라 칭하고 이곳에 거처한다
또한 을미사변때 러시아대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고 칭했지만 고종강제퇴위 후에 경운궁은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덕수궁으로 변경된다
현재의 덕수궁 정문은 대한문이나 원래는 대안문이었다가 1906년에 변경한 것이다

대한문((大漢門 동쪽) :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인화문(남쪽)이었는데 동쪽문을 정문으로 바꿈
정관헌(靜觀軒) : 동서양 절충식 건물로 고종 때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감상을 하던 곳이며
                      철제난간에는 사슴.소나무.당초.박쥐등의 전통문양을 넣어 지었다
함녕전(咸寧殿) :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다가 1919년1월21일 이곳에서 승하함
덕홍전(德弘殿) : 외국사신과 일반빈객의 접견실로 사용하던 곳
                      역대 조선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보관했던 장소라고도 한다
석어당(昔御堂) : 목조 2층건물로 선조가 거처하다가 1608년에 승하한 곳이며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된 곳이며 인조반정 성공 후엔 광해군이 뜰아래 무릎 꿇은 곳
준명당(俊明堂) : 목조건물로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신하와 외국사신 접견장소와
                      고종의 침전으로도 잠시 사용되었고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도 사용됨
즉조당(卽阻堂) :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며
                       고종의 후비(순헌 엄씨)가 1907~1911년동안 거처하다 승하한 곳이다
석조전(石造殿) : 영국인이 지은 유럽풍 건물로 외국사신 접견장소와 고종침전으로도 사용됨
                      광복 후에는 전시관으로 사용됨.석조전 뒤의 포덕문(布德門)을 나서면 그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이다
석조전별관 : 이왕가의 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이 됨
중화전(中和殿) : 고종이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즉조당으로 와서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협소하여
                       1902년에 2층으로 중화전을 지어 사용하였으며 화재 후에 1층으로 지음
                       앞뜰에는 문무백관의 품계석이 있음
광명문(光明門) : 원래는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위치 이전됨
중화문(中和門) : 원래 덕수궁의 정문으로 1904년4월14일 함녕전 온돌수리공사 중에 화재로 없어졌다가 다시 중건됨


[명동 산책]
전쟁 중에 명동을 추억하는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거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그래도 그 시절 추억을 되살려주는 한 식당이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유네스코회관 부근의 '은성주점터' 맞은 편에 자리한 '명동백작5060'이다

1956년 3월 12일에 명동의 한 대폿집에 모여 앉아 박인환.이진섭.송지영.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장소는 '은성주점'으로 배우 최불암 모친이 운영하던 술집이었다

가수이면서 배우인 나애심이 여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백치 아다다' 개봉 전날...
그녀가 출연한 영화 선전을 위해 기자 및 문인들과 함께 한 술자리였다

그때 술을 마시던 박인환 시인이 갑자기 종이와 펜을 꺼내어 끄적거린 즉흥시가 바로
지금까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이다

옆에 있던 이진섭이 그 시에 바로 곡을 붙였고 나애심이 곡에 맞춰 노래했다
나중에 명동백작 이봉구와 함께 술자리에 합석한 테너 임만석이
명동에서 우렁차게 이 노래를 부르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한다

그 당시 명동은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천국이었으며
청동. 돌체. 서라벌. 갈채. 휘가로. 모나리자. 동방싸롱. 은성주점 등이 있었다

현재의 명동예술회관은 1935년에 세워진 영화관으로 객석 1180석의 3층 건물이었다
광복 후 서울시가 시공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공연장으로 활용하다가 또 은행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명동거리를 휩쓸고 다니던 예술가들은 주로 명동백작 이봉구를 비롯하여
오상순.박인환.김수영.이중섭.전혜린.김관식.조지훈.유치진.조병화.김환기.변영로.박계주.노천명 등이다

주먹을 쓰는 사람 중에서도 명동을 관할하는 명동파 이화룡은 명동을 사랑하여 예술가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친구와 헤어져 오는 길에 아들집에 들러 아이랑 또 한강공원에서 놀다가 저녁식사까지 하고 집에 왔다

▲덕수궁 안내도

▲덕수궁 안의 연못

▲정관헌

▲정관헌 내부의 꽃등

▲함녕전

▲덕홍전

▲지붕 위의 '어처구니'들..... 참고: 어처구니=맷돌손잡이 or 흙으로 만든 동물형상

▲왼쪽부터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이 한 눈에 보인다

.

▲석어당

▲석어당 뒷편

▲즉조당

▲준명당

▲석조전

▲석조전 앞 전경

▲중화전

▲중화전의 품계석

▲명동의  '은성주점터'

▲진주냉면으로 점심식사

▲명동백작 5060의 내부를 둘러본다

▲배우 최불암의 글씨

▲이 정도면 정말 외상을 할 수 있을까? ㅎㅎ

▲명동예술극장

▲청계천을 걸어서 지하철역으로

▲우산지붕이 시원하다

▲시청광장에서는 축하공연 리허설 중이었다

▲시청건물의 사진~  부디 평화적인 통일을!

▲아이랑 한강공원에서 배의 탐험을 했다

▲벌써 사진찍기가 취미인 꿈나무가 찍어 준 사진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