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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일탈(보호)

♧가족과 추석보내기

큐티 2017. 10. 4. 15:53

▲화창한 날씨의 경복궁 '경회루' 경치

 

이번 추석은 장장 10일 동안의 황금연휴로~ 오늘은  10월3일 개천절이다
둘째아들 가족은 싱가폴에서 근무 중이라 올 수 없어서... 큰아들 가족과 함께 경복궁 산책도 할까 하고 그 부근의 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식당을 가면서 차를 타고 지나다보니 경복궁 입구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여 산책할 곳을 길상사로 변경하여 다녀왔다

                ▲맛집을 검색하여 가 본 곳인데~ 가격에 비해 음식은 그냥 그랬다

 

식사 후에는~ 경복궁을 가려다가 포기하고 아이와 함께 가까운 숲길을 걷기 위해 길상사로 가서 오랜만에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긴 연휴의 추석이라 사람들이 분산되어 경복궁엔 인파가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많았다

▲김영한이 운영했던 '대원각'요정을 법정스님을 통해 기부하여 만들어진 '길상사' 

▲예전엔 이 곳이 개방되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문이 열려 있었다

▲본명은 '김영한'~ 백석시인과의 일화가 유명한 길상화 보살 초상화

▲법정스님 초상화

▲이곳은 언제 와 봐도 참 아름다운 곳이다

 

이번 기회에 다시한번 경복궁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이다
북으로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중건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관청들.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과 건물들
휴식을 위한 정원시설들을 조성했으며 왕비의 중궁.세자의 동궁.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1911년에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파괴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광화문이 원형복원되었다

담장의 사방에 4대문을 만들고 1426년(세종8)에 건춘문(동).광화문(남).영추문(서).신무문(북)이라 이름 붙였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3개의 홍예문이 나 있는 높은 석축 위에 중층의 문루가 높이 앉아 있는 장려한 건물이다

근정전(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에서는 문무백관이
  한 달에 네 번 조회를 열었고 품계석 앞에는 표범가죽.호랑이가죽.양가죽.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사정전(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은
  매일 새벽3시부터 업무보고와 회의를 했고 그 옆의 만춘전.천추전은 보조편전으로 온돌방이다

 

강녕전(왕침전으로 井자 모양으로 9개의 방)과 1440년(세종22년)에 건립된
교태전(왕비침전)이 있고 그 뒤의 아미산(왕비의 후원)의 굴뚝이 아름답다

강녕전 옆에는 세종때 건립된 흠경각(천체운행)과 유교국가 속의 함원전(불교모임)이 있고
  장영실이 1434년(세종16)에 만든 앙부일구(해시계).옥루기륜(물시계)이 있다

▲동궁

원래 궐밖에 있던 동궁을 세종때 궐안으로 들이며 자선당(세자내외 거처)과
  비현각(공부하며 정무보던곳).시강원(세자교육).익위사(경원담당)를 지었다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은 일제시대에 철거되었고 자선당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은 일본인에게 팔려가기도 하였다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빼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옮긴 뒤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이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돌들을 1993년에 김정동 교수가 발견하여 노력 끝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이미 상해 버린 돌들은
자선당 복원 때 쓰이지 못하고 건청궁 동편 녹산 한 쪽에 놓여져 있다

자경전(고종즉위에 기여를 한 헌종모친인 신정왕후의 대비전)은 1888년에 복원된 가장 옛건물이다

신정왕후 조씨는 남편 효명세자가 22세에 요절하고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대비가 되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일찍 죽자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즉위시켜 신정왕후의 힘을 약화시켰다
안동 김씨의 서슬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철종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인조의 8대 손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의 혈통을 잇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신정왕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차남을 양자로 삼고 고종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고종의 나이가 12세여서 10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을 주도했다

 

경회루(왕실정원-외국사신접대)는 1412년에 지었고 임진왜란때 불탔으나 1867년에 복원되었다
  경회루에는 연산군.중종. 단종의 일화가 숨겨져 있다

경회루에서 연산군이 흥청(궁궐로 뽑혀온 기생)들을 데리고 연회를 베풀어
맑음을 일으키는 '흥청'이 '망청'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경회루 2층누각에서 보면 서쪽의 인왕산이 보이고~ 연산군폐위하고 왕이 된 중종은 왕비와 결별한다
왕비(단경왕후 신씨)가 연산군과 관련되어 있어서 강제로 폐위당한 뒤에
폐위된 신씨는 경회루에서 잘 보이도록 인왕산 바위에 분홍색치마를 펼쳐놓고 중종을 그리워 했다
세조가 즉위할 때 단종은 경회루에서 옥새를 넘겨주었고 단종복위를 꿈꾸던 사육신은 사형에 처하게 된다

광화문 육조거리의 관청들을 궐외각사. 궁궐 내의 관청은 궐내각사라고 하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쓰였다

 

 

 

 

 

향원정은 고종이 건청궁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중앙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후궁들의 처소였던 흥복전(없어짐). 함화당. 집경당은 향원정 연못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건청궁(을미사변 1895년 10월8일 명성왕후 시해)은 고종이 지었고
  곤녕합(왕비처소).장안당(왕처소).관문각(서재)가 있었다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1891년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내부2층)와 협길당(온돌방 휴식장소)등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서재와 외국사신 접견소로 사용하고 팔우정은 청나라풍의 정각이다

태원전(어진보관)은 고종 왕권승계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지은 곳으로
  일제때 철거되었고 5.16쿠데타 때는 청와대경회부대가 들어섰으며
  1979년에는 '경복궁모의'를 가진 곳으로 2006년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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